나는 제주도 대표 대의원이었다. 한 달쯤 후 재소집하는 선거총회에 도지부 사무국장 김경호(金炅昊)씨와 같이 상경해서 호텔에 투숙하여 보니 광주대의원과 같은 호텔이었다. 임기가 다 된 지금의 회장은 많은 대의원이 거부하므로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며 입후보 포기의사를 밝히고 은거하여 총회 의장직도 거부해버렸다.
분위기가 이래서 새마을금고중앙연합회 회장 입후보자가 없는 것이다. 서울 출신이 입후보하려해도 부산·경상도에서 거부하는 분위기고, 대구에서 입후보자를 내려 해도 서울·호남이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입후보자가 없어 총회를 개회조차 못하게 되었고, 다시 유회되어 중앙총회가 표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때 묘안을 내었다. 새마을금고중앙회에서 발간하는 「봉명(蜂鳴)」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전 제주도지사였던 이규이(李圭貳)씨가 새마을금고 부회장이 되어 이 「봉명」에 기고한 것을 몇 차례 읽은 적이 있고 제주도지사를 지낼 때 청백리로서 매울 훌륭하다는 평들이 있었으나 전두환 정권과는 거리가 있어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나서 이 분을 천거하였다. 처음에는 새마을금고연합회제주도지부 김경호 국장과 의논하고 합의가 되니 밀어보자고 결심하고 우리와 같이 투숙하는 광주대의원과 협의하였다. 출신이 이북이어서 지역감정으로 거부할 명분이 없고, 지사를 지낼 때 매우 청렴하여 믿을 수 있고, 전에 금고에 관여한 경험이 있으니 중앙회장 자리가 생소하지 않고, 중앙회 뿐만아니라 일선 금고에 대하여도 배려함이 있을 것이니 현재는 이 분보다 나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설명하였다. 광주대의원 중에도 그분을 안다는 사람이 있어 찬동하는 것이었다. 제주도 대의원이 나서면 설친다 할 것이므로, 광주대의원님이 호남분들을 설득하시도록 권유하니 광주시대의원이 전라도대의원 숙소를 다녀왓 호남은 금방 의견일치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덜한 강원도 대의원을 설득하게 하고 강원도가 나서 충청도를 설득하여, 이제는 이규이 전 제주도지사를 옹립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렇게 여론이 형성되자 대립관계에 있던 부산, 대구, 서울이 동조하는 것이었다. 대표를 선출하여 이규이씨의 의사 타진에 나섰다. 이규이씨는 단독 출마면 나가지만 경쟁은 하지 않겠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경쟁자 없이 만장일치로 옹립하자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규이 전 지사를 추대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회장직 맡을 것을 수락받았다.
다음날 무사히 총회를 개최하고 이규이 전 제주도지사를 만장일치로 중앙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회장이 즉석 취임하고 의장이 되어 상정된 의안을 처리하는데, 제주도지회 건물을 신축하는 예산 승인건이 상정되자 자산이 전국에서 가장 영세한 지역에 거액투자는 불가하다는 반대자가 여럿이 나와 반대토론에 나섰다. 집행부와 우리가 찬성 발언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정회에 들어갔다. 당신을 추천한 최초의 대의원이 제주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어려운 제주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과정에는 김경호 제주지회 사무국장이 많이 애썼다. 나는 의견을 내고 지역정서를 감안하면서 막후에서 조정하였고 앞장서 다닌 사람은 다년간 중앙회에 관여한 김국장이었던 것이다.
이규이 회장님이 제주도 사정을 잘 설명하면서, 관광지 제주에 갈 때 무료숙박도 하고 휴양지 별장으로 이용가치를 인정하자고 호소하여 예산승인을 받아내었다. 장담하지만 나의 묘안이 없었으면 새마을금고제주도지회 건물은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신제주새마을금고 이사장직을 자진반납하니 중앙회와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지만, 나의 숨은 공으로 제주도지회 건물이 완성될 때는 ‘새마을금고제주도지회’ 회장을 비롯한 전도의 새마을금고 가족이 성대한 준공식을 갖고 입주하여 지금도 어려움없이 지회가 유지되고 있다. 만일 이 건물이 없으면 남의 건물에 세들어 이사 다니는 수고가 많았을 것이고 문서나 자료 보관에도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제주도지회 건물 앞을 지날 때는 옛 생각이 떠오르고, 하필 그때 그런 생각이 떠올라 한 인간의 인생행로에 한 매듭을 짓게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분좋은 상념에 젖어보곤 한다. 아이디어도 때맞추어 나와야 빛난다.